201709 - minjok.or.kr · 2002년 10월 고농축우라늄(heu) 핵개발 의혹으로 제2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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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족문제연구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더위 사냥’은 전시총동원으로 - 애국반 회보 2·시론 북핵 위기, 진단과 전망 4·초점 2017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 ‘한·중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서’ ‘2017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 연구소, 『항일음악 330곡집』 출간 팟캐스트 역적 8월 특집 제작 연구소와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친일문학상 반대 특별 전시 ‘친일문인 과 그들의 작품’ 열어 ‘교육적폐 청산’을 위해 역사교과서 국정화 공익감사 청구 돌입 연구소·한겨 레21 공동기획 연속강좌 ‘적폐청산’, 열띤 분위기 속에 진행중 15·인터뷰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공무원 노동조합 우정사업본부 이형철 위원장 19·열전 친일파 정경유착의 원조이자 매판자본가 1호 박흥식 27·기고 ‘박정희 혈서기사 조작’ 주장 정미홍 형사재판 방청기 29·돌려보기 경위서 이인호·고영주, 이명박근혜 부역자이자 현대판 친일부역자 36·식민지 비망록 침략전쟁의 선봉에 선 일본군대의 깃 발 욱일기 42·기증자료 43·회원마당 조문기 의사- 광복이니 해방이니 함부로 말하지 말라 통!하 는 만남, 마음 따뜻했던 답사 46·책소개 20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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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민족문제연구소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

    민 족 문 제 연 구 소 회 보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더위 사냥’은 전시총동원으로 - 애국반 회보 2·시론 북핵 위기, 진단과 전망 4·초점 2017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 ‘한·중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서’ │ ‘2017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 │ 연구소, 『항일음악 330곡집』 출간 │ 팟캐스트 역적 8월 특집 제작 │ 연구소와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친일문학상 반대 특별 전시 ‘친일문인과 그들의 작품’ 열어 │ ‘교육적폐 청산’을 위해 역사교과서 국정화 공익감사 청구 돌입 │ 연구소·한겨레21 공동기획 연속강좌 ‘적폐청산’, 열띤 분위기 속에 진행중 15·인터뷰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공무원노동조합 우정사업본부 이형철 위원장 19·열전 친일파 정경유착의 원조이자 매판자본가 1호 박흥식 27·기고 ‘박정희 혈서기사 조작’ 주장 정미홍 형사재판 방청기 29·돌려보기 경위서 │ 이인호·고영주, 이명박근혜 부역자이자 현대판 친일부역자 36·식민지 비망록 침략전쟁의 선봉에 선 일본군대의 깃발 욱일기 42·기증자료 43·회원마당 조문기 의사- 광복이니 해방이니 함부로 말하지 말라 │ 통!하는 만남, 마음 따뜻했던 답사 46·책소개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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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위 사냥’은 전시총동원으로 - 애국반 회보

    미리보는‘식민지역사박물관’ 35

    “찌는 듯이 무더운 남방에서는 아귀 같은 미국과 영국을 쳐물리기 위한 싸움이 매일같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조선의 더위쯤은 문제도 아닙니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1943년 8월 1일,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발간한 제32호 애국반 회보다. 애국반 회보는 1941년 9월 인가를 받아 매월 1일에 발행되던 간행물로 내용은 전시상황에서 후방은 어떻게 생활할 것인가에 맞춰져 있다. 특히 32호는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8월에 발행한 것으로 주요 기사의 내용도 여름철 후방의 전시준비태세에 관한 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더위에 지지 말고 몸을 튼튼히 해서 근로보국에 힘씁시다’에서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더 덥게 느껴지니 더위를 잊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하며, 전투 중인 병정들을 생각하면 덥다는 생각조차도 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도 몸이 약하면 더위에 지게 되니 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신사나 절, 공원을 청소’, ‘개천이나 하수도, 농촌이나 공장에 근로봉사’, ‘5리쯤 되는 데

    는 걸어 다닐 것’ 등을 소개한다.‘전시살림은 이러케!’에서는 전쟁은 제일선의 병사들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가정, 일터, 거리 등

    싸움터가 아닌 곳이 없으며 특히 부엌에서 밥 지어 먹는 것도 ‘전쟁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으로 생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싸움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활전선에서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지각과 결근하지 말라고 선동한다. 저금은 나라의 힘이며 시중에 돈이 돌지 않게 되면 물건값도 올라가지 않고 살림살이도 안정되며 결국 이는 집안이 부자가 되는 것이고 곧 나라가 부자가 된다는 이해할 수 없는 논리로 각 가정에 강제저축을 독려했다.

    또한 옷감을 만들기 위해 쓰는 양잿물을 화약으로 만들면 대포알 630만 발, 총알 17억 7천 8백만 알이나 되니 각 가정에서는 헌 옷을 고쳐 쓰고, 애국반원끼리 돌려가며 나눠 쓰라고 강조한다.

    애국반회보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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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언제나 전장에 나간 병사와 갓튼 생각으로’에서는 화려한 옷을 입지 말고 ‘미국과 영국식 옷차림을 좋아하는 자는 우리의 원수’라고 지칭하며 전시 물자절약을 ‘전쟁승리’와 ‘애국’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의 날은 왓다 징병준비는 다되엿슴니까’에서는 곧 실시될 징병제에 대해 ‘반도 2천5백만 동포의 감격’으로 칭하며 징병대상자는 호적을 정리하고 국어(일본어)를 배우며, 대상자가 아니더라도 만17세 이상의 남자는 지망하라고 독려하며 조선의 청년들을 일제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마지막으로 “여러분 다 읽으섯거든 뒷면에 있는 그림을 하나식 따로 오려서 눈에 잘 띄이는 곳에 부쳐 두십시요”라는 문구를 따라 회보의 뒷면을 보면 전시생활에서 지켜야 할 일들을 만화와 함께 설명하고 있다. ‘으싸! 결전생활로’라는 구호 아래 일찍 일어나 출근하고 음식을 남기지 말며, 무지각 무결근하고, 옷을 기워 입으며, 출장 갈 때는 각반을 준비해 비상시를 대비하고, 옷소매 폭을 줄여 옷감 낭비를 줄이고, 출정 군인 집이나 그 유가족의 일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애국반’은 전쟁동원을 선전·선동하고 민간인을 일사불란하게 통제할 목적으로 각종 관변기구와 친일단체를 흡수해 조직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최말단 기구로 주민 통제와 조선총독부의 정책 홍보, 물자와 노동력동원 등에 활용되었다. ‘애국반 회보’는 바로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시책을 말단 주민조직까지 전달·관철시키는 수단이었다. ∷ 강동민 자료팀장

    애국반회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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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론

    북핵 위기, 진단과 전망

    북한은 지난 7월 두 차례의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급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마침내 미국 본토 타격 가능성이

    현실화되었다. 동북아 전략 구도의 게임체인지 순간이 다

    가왔다.

    ICBM은 현대 군사 기술의 집약체이다. 워싱턴포스트

    (WP)는 속옷도 제대로 못 만드는 북한의 ICBM 개발이 미

    스터리라고 하면서, 성공 요인을 크게 세 가지로 봤다. 첫

    째, 지난 수십 년 간 ICBM 관련 과학자들을 꾸준히 관리

    했으며, 둘째 스스로 확보한 비공식 글로벌 금융 네트워크를 활용해 미사일 개발 비용을 감당했

    고, 마지막으로 김정은이 미사일 개발에 정권의 사활을 걸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연합뉴스 2017.7.10). 그러나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는 워싱턴포스트 분석보다 뿌리가 더 깊다.

    북한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 고립무원의 외톨이가 됐다. 이에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에 올인했다.

    모든 국가자원을 다 쏟아 부었다. 북한 스스로 핵개발 의도를 미국의 핵위협 대처, 재래식 무기의

    엄청난 비용 부담에 따른 코스트 측면에서 핵개발, 그리고 민족통일의 원동력 구축임을 밝히고 있

    다. 북한의 ‘피포위 의식’과 미국의 대북 핵위협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 무엇보다 우리는 ‘통일 무

    기로서의 핵’이라는 데에 북핵의 본질을 정확히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의 북한 비핵화 전략은 실패했다. 왜 실패하고 말았는가? 미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우려하면서도 적극적인 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가 군산복합체 입장에

    서 달갑지 않은 상황일 수도 있었고, ‘불량국가’와의 협상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제국 미국의 위

    상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미국은 좀체 북한과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체결의 세 이벤트

    가 주목된다. 그해 말 전술핵무기가 철수되었다. 독일 통일(1990.10.3)을 전후하여 한소수교

    (1990.9.30), 한중수교(1992.8.24)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북한과 미일과의 교차승인은 이루어지

    지 않았다. 1992년 초 북한은 주한미군 주둔 용인을 전제로 북미수교를 요구했지만, 미국은 거절

    했다. 그러자 북한은 핵프로그램 추진으로 돌아섰다.

    조민 평화재단 평화교육원장 통일연구원 석좌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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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핵, 협상 실패의 역사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몇 차례의 협상 타결이 있었다. 1994년 10월의 제네바 기본합의로 제1차

    핵위기가 봉합되었다. 그러나 당시 클린턴 행정부와는 달리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의 발목잡기에

    걸려 경수로 건설의 첫 삽을 뜨는데 3년 가까이 걸렸다. 1998년 8월 31일 대포동 미사일 발사로

    다시 미국의 주목을 끌었다. 2000년 10월 12일 워싱턴의 「북미 공동코뮤니케」(US-DPRK Joint Communique)로 한반도의 새 역사의 장이 열리는 듯했다. 그러나 공동코뮤니케는 다음해 부시

    대통령에 의해 찢겨지고 말았다.

    2002년 10월 고농축우라늄(HEU) 핵개발 의혹으로 제2차 핵위기가 불거졌다. 우여곡절 끝에

    다음해 8월 다자간 협상틀인 6자회담이 개최되어 커다란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2005년 「9·19 공동성명」으로 거의 완벽한 합의문이 도출되었다. 그러나 이 합의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북한 자금을 묶은 BDA(방코델타아시아)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북한은 다음해(2006.10.9) 마침

    내 제1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이에 놀란 미국은 다시 북미 양자 협상을 서둘렀다.

    2008년 6월 영변 5MW 원자로 냉각탑 폭파, 10월 테러지원국 해제 등 북핵 협상이 순항하는

    듯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6자회담은 2008년 12월의 6차 회담을 끝으로 지금까지 열

    리지 않고 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김정일이 2008년 8월 스트로크(뇌졸중)를 맞았

    다. 갑자기 건국기념일(9월 9일) 행사가 취소되었다. 그러자 김정일 사망 관련 예측 보도가 봇물

    을 이루었다. 미국 정보기관을 중심으로 김정일 사망 후 대책이 얘기됐고, 미국과 한국에서 북한

    붕괴론이 크게 부각되었다. 학술 세미나, 언론은 호들갑을 떨었다. 미국은 협상 판을 걷어 치웠다.

    김정일은 ‘유감스럽게도’ 3년이나 더 살았다. 그 3년 동안 중국과 러시아를 수차례 방문했고, 핵

    미사일 소요 첨단 소재와 장비들을 구입했다. 2009년 1월 김정은을 세습 후계자로 내세웠다. 김

    정일은 3년의 후견 기간을 통해 절대 미국을 믿어서는 안 되고, 핵미사일만이 살 길이라는 점을

    확신시켜주고 떠났다. 김정일의 사망이 급변사태나 붕괴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북한 비핵화, 2단계 접근미국은 본토 침공을 두 번 당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1941.12.7), 2001년의 9․11 테러가 그것이

    다. 북한 핵·미사일 위협과 언어폭탄으로 미국 시민의 충격은 크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오바마

    대통령의 ‘전략적 인내’는 사실상 전략적 무대책으로 실패했다. 그렇다고 선제타격(preemptive

    strike), 예방전쟁(preventive war) 카드를 함부로 휘두를 형편은 못된다.

    북미 간 치킨게임이 진정 국면에 들어서는가? 북한의 협박 자제와 한미연합훈련 축소로 일단

    긴장국면을 넘긴다면, 이제 본격적인 협상 모멘텀을 찾아 나서야 한다.

    2단계 접근이 가능하다. 1단계는 위기 봉합과 핵·미사일 상황 악화 방지에 초점이 있다. 이는 ‘동결

    vs 제재·압박 해제(완화)’의 맞교환이다. 2단계는 장기전망 구도 위에서 ‘핵폐기 vs 평화체제’ 협

    상틀이 예상된다. 1단계 진입이 쉽지는 않지만, 협상 이외에 다른 길이 있겠는가?

    편집자주 - 이 시론은 8월 25일 접수된 글이라 이후 북핵 위기의 변동 사항이 반영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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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 ‘한·중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서’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와 연구소가 공동 주최하고 경기도교육청 ‧ 농협중앙회 경기지역본

    부 ‧ 연구소 광주지부(지부장 김순흥)가 후원한 2017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가 8월 1일부터 5일까지 중국 난징과 광저우에서 진행됐다. ‘한·중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번 답사는 한국은 물론 중국의 반제 항일운동 유적지를 동시에 답사함으로써 민간 차원에서 동북아 평화증진과 한중 관계 개선에 기여하고자 했다.

    임정 초대 국무령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증손자인 이항증 선생(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을 단장으로 하여 구성된 34명의 답사단은 이틀 동안은 난징에서 일정을 소화했는데 쑨원이 근무했던 총통부를 시작으로 난징대학살기념관, ‘위안소’ 진열관, 임정 주화

    대표단 본부, 항공열사공묘,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 터, 민족혁명당 거점인 호가화원 등을 답사했다. 난징대학살기념관은 학살 80년을 준비하며 대대적인 보수공사 중이었으며 최근 한국인 방문자가 급증한 ‘위안소’ 진열관에는 연구소가 발간한 책(『일본군 ‘위안부’ 문제』 2009)도 전시되어 있어서 답사단의 눈길을 끌었다. 임정 주화대표단 본부는 현재 개인 주택으로 쓰이고 있는데 집주인의 배려로 마당까지 들어가 볼 수 있었다. 항공열사공묘는 항일전에 참전해 전사한 중국인 조종사 외에도 소련, 미국, 조선인 조종사 이름(전상국, 김원영)도 정성스럽게 새겨져 있었다. 김원봉의 주도로 설립된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는 현재 천녕사라는 개인 사찰로 이용되고 있고 산길을 헤치고 가야 했으며 아무런 표식도 없어서 답사단들을 안타깝게 했다. 난징에서 답사단이 선택한 숙소인 중앙반점은 윤봉길 의사 의거 후 백범이 장제스를 만나기 위해 묵었던 의미 있는 곳이었다. 셋째 날 답사단은 중국고속열차로 7시간을 이동하여 광저우에 도착해 중산대학, 황포군관학교, 신해혁명기념관, 광주기의열사능원과 중조인민혈의정 등을 둘러 봤다. 여운형을 비롯해 수많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다녔던 중산대학은 여전히 중국인의 자부심이었고 황포군관학교 역시 항일역사를 배우려는 중국인들로 북적였다. 청 왕조를 거부하고 민주공화제의 기치를 올린 1911년 신해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신해혁명기념관은 그 규모부터 웅장했다. 광주기의열사능원은 1927년 반국민당 무장봉기인 광저우꼬뮌에 참가해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150여 명의 조선인 혁명가들이 중국인 혁명가들

    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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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 함께 묻힌 곳이다. 답사단은 중국정부가 조선인 혁명가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인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宜亭)에서 조선인 영령들께 경례를 올리는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진행된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는 박승춘 보훈처장 체제에서는 전혀 지원을 받지 못했지만 다행히 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 선생의 후손인 이재정 경기도교육감의 후원과 관심으로 2014년부터 올해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고 진행되고 있다. ∷ 방학진 기획실장

    ‘2017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8월 12일 일본 도쿄의 한국YMCA에서는 ‘2017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야스쿠

    니반대촛불행동 행사가 열렸다.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침략신사 야스쿠니를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한국, 타이완, 오키나와, 일본의 시민들이 2006년 8월부터 매년 도쿄에서 “야스쿠니 반대! 합사 철회!”의 촛불을 들기 시작한 이래 계속되어 올해로 열두 번째를 맞았다.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은 오랫동안 금기시되어 왔던 야스쿠니의 문제를 일본 사회에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해 왔는데, 연구소는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의 사무국을 맡아 한국에서 야스쿠니 반대운동을 중심적으로 이끌어 왔다.

    올해 촛불행동에서는 이른바 ‘전후체제’를 끝내고 평화헌법의 개정을 통해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의 부활을 꿈꾸는 아베 정권의 폭주를 막는다는 취지에서 “동아시아의 시점에서 ‘메이지유신

    150년’을 다시 묻는다”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진행했다. 심포지엄에서는 다카하시 데쓰야(高橋哲哉) 도쿄대 교수, 하라 다케시(原武史) 방송대 교수,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한일관계연구소 근현대연구실장이 메이지 유신 150년을 맞아 아베 정권이 진행하고 있는 메이지 영광의 부활 프로젝트, 현재 천황의 퇴위를 둘러싼 논쟁과 메이지 150년, ‘동양평화’의 시점에서 본 일본과 아베 총리의 역사인식 등에 관해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어서 일본의 침략전쟁에 군속으로 동원된 아버지가 야스쿠니에 합사된 유족 동정남 씨의 절절한 호소가 참가자들을 숙연하게 했다. 동정남 씨의 아버지 동선홍 씨는 1944년 군속으로 일하던 배 하쿠요마루(白陽丸)가 미군의 공격으로 오호츠크 해에서 침몰하여 전사하였다. 동정남 씨는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기록을 찾기 위해 수십 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하여 아버지의 기록을 찾았다. 아버지가 야스쿠니에 합사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느꼈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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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합사 철회를 요구하며 재판투쟁에 참여한 경험을 소개하며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함께 싸워나가자고 호소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이희자 대표는 내년에 문을 열게 될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운동에 성원을 보내준 일본 시민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오랫동안 한일시민연대를 통해 함께 해온 시민들이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아줄 것을 호소하였다. 마지막으로 진행된 ‘고토부키(寿)’와 손병휘, 이정열의 듀엣 인기가수의 콘서트는 ‘아침이슬’을 함께 부르며 행사장을 뜨거운 열기로 가득 메웠다.

    촛불행동의 마지막을 장식한 촛불행진은 우익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동원된 많은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몇 해 전처럼 우익들이 차량으로 시민들을 향해 돌진하는 사태는 없었지만, 몇몇 사람들이 확성기로 고함을 지르고 행진 대열에 뛰어들어 경찰이 몸싸움으로 이를 저지하는 소동이 행진 내내 끊이지 않았다. 촛불 시위대가 지나는 거리 곳곳에서 혐오발언을 일삼는 모습도 여전하였다. 그러나 “전쟁 반대! 야스쿠니 반대! 아베 퇴진!”을 외치는 평화의 촛불은 그들의 협박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뜨겁게 타올랐다. 2017년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의 주요 행사와 촛불행진 과정은 ‘팟캐스트 역적’을 통해 동영상으로 볼 수 있다.(https://www.minjok.or.kr/archives/90628) ∷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연구소, 『항일음악 330곡집』 출간 72주년 광복절을 맞아 연구소가 기획하고 지난해 작고한 노동은 전 중앙대 교수가 책임 집필한 항일음악 330곡집이 출간되었다. 노동은 교수가 동학농민혁명 시기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국내와 만주 및 중국 관내, 러시아 원동지역, 하와이와 미국 본토, 멕시코 등지에서 불렸던 항일 노래를 총망라하여 정리하였으며 집필에만 5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연구소와 한국음악연구소의 연구원들도 작업에 힘을 보탰다.항일음악 330곡집에는 그간 잘 알려져 있던 민족주의 계

    열은 물론 사회주의 계통의 항일 노래들도 포함됐으며, 특히 새로이 발굴한 100여 곡도 수록됐다. 채보 복원 등의 방식으

    로 330곡 전부 악보를 실었으며, 작사 작곡자의 실명 여부, 가사 원문과 출전, 원곡과 출전, 노래의 성격과 유래, 보급지역, 음악적 특성 등에 대한 해설도 부기했다.

    이 책은 연대별로 ① 1860∼1900년대 : 83곡, ② 1910년대 : 68곡, ③ 1920년대 : 72곡, ④ 1930년대 : 63곡, ⑤ 1940년대 : 44곡으로 구분되어 있다. 각 연대별 대표곡을 꼽자면 1900년대 이전에 불린 「거국행」 「격검가」 「무궁화가」 2, 1910년대 「국민」 「국치일노래」 「독립가」 4, 1920년대 「단심가」 「독립군가」 2 「3·1 소년가」, 1930년대 「민족해방가」 「자유의 기」, 1940년대 「광복군가」 「압록강행진곡」 「진군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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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음악들은 국내 민요와 외국의 유명곡 가락에 우리말 가사를 붙여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근대음악이 소개된 초기여서 작곡할 수 있는 이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외국곡인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은 해방 직후까지도 애국가의 곡조로 차용됐다. 「올드 랭 사인」은 1900년대에는 「무궁화가」 1910년대에는 「앞 뫼의 칡같이」 1920년대에는 「신년축하가」 1930년대에는 「주일학교 교가」 등의 곡조로 지속적으로 활용됐다. 그 외 「여름날의 마지막 장미」 「조지아행진곡」 「아! 목동아」 「전나무」 등 세계적인 명곡들도 애용되었으며, 심지어 일본의 창가와 군가까지도 개사하여 이용했다.

    국내외의 독립운동가들도 항일음악의 작사가와 작곡가로 이름을 남겼다. 작사가들 가운데 알려진 인물들로는 도산 안창호, 학도가로 유명한 김인식, 독립운동가 이범석 등이 있다. 특히 도산 안창호는 「애국가」1 「학도가」 등 가장 많은 가사를 남겨 조국독립을 향한 그의 열정을 확인하게 해 준다. 항일노래를 새로이 작곡한 이들로는 이성식, 이상준, 이두산, 이정호, 정율성, 한유한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중 한유한은 광복군 제2지대 소속으로, 유명한 「압록강행진곡」을 비롯해 광복군이 열창한 군가를 다수 작곡했다. 정율성은 「조국 향해 나가자」 등 조선의용군이 부른 군가도 작곡했지만, 「연안송」 「팔로군행진곡」 「팔로군군가」 등 홍군의 대표적인 노래들을 작곡해 중국 대륙에 명성을 떨쳤다.

    연구소는 이 책을 각급 학교에 보급하는 한편 항일음악회를 개최하고 편곡 등을 통한 대중화 작업에도 나설 계획이다. ∷ 편집부

    팟캐스트 ‘역적’ 8월 특집 제작광복절을 맞이한 8월에 팟캐스트 역적은 3편의 특집방송을 제작하였다. 1편 ‘박주민 의원,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업로드 8월 16일), 2편 ‘도쿄 야스쿠니반대 촛불행동에 가다’(8월 24일), 3편 북콘서트 ‘항일음악 330곡집’(8월 28일)이 바로 그것이다.

    제1탄은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섭외가 관건이었는데 박주민 의원이 흔쾌히 승낙해주어 특집 1탄 제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박주민 의원,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는 ‘역적’ 최초의 영상 팟캐스트이자 최초의 페이스북 라이브 팟캐스트였다. 음성 팟캐스트를 만드는 것보다 2배 이상의 공력이 들었는데 깨끗한 음질과 화질을 얻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박 의원은 특유의 진지함과 순발력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에 대한 심도 깊은 질문을 던졌고 박한용 실장은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필요성에 대해 진지하게 답변했다. 노기환 MC는 재치 있는 입담으로 분위기를 살렸고 김승은 자료실장은 박물관의 건립경과와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해주었다.

    특집 2탄 ‘도쿄 야스쿠니반대 촛불행동에 가다’는 ‘역적’ 최초의 해외 로케이션이었다. 김영환 대외협력팀장의 주도하에 매년 8·15에 맞추어 열리는 야스쿠니 반대 촛불행동의 생생한 현장을 취재하였다. 김영환 팀장은 촛불행동의 각 행사에 대해 설명하고 거리 시위에서 외치는 구호와 일본 우익들의 혐오발언을 가감 없이 현장의 목소리로 전달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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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3탄은 항일음악 330곡집 출간기념 북 콘서트였다. 항일음악 330곡집의 저자인 고 노동은 교수의 아들 작곡가 노관우 씨가 항일음악 관련 공연 겸 강의를 해주었으며 동료들과 함께 독립의 노래, 혁명의 노래로

    무대를 꽉 채워주었다. 그리고 항일음악 330곡집 제작에 열성을 다한 이명숙 연구원은 제작과정의 에피소드와 이 책의 역사적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이번 ‘역적’ 8월 특집은 8·15 광복절을 기념하는 의미도 있지만 내년 개관할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널리 홍보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특집편 곳곳에 식민지역사박물관 후원을 독려하는 메시지를 삽입하였다.

    1탄 박주민 의원 편이 공개되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 대한 격려 전화와 후원금 답지가 크게 늘었고 이러한 추세는 2편과 3편까지 이어졌다. 연구소 팟캐스트 제작진은 8월 28일 시즌1 역적 마지막 녹화를 끝으로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다. 시즌 2에서는 연구소만의 특색 있는 이야기를 시즌 1보다 유익하고 재미있게 전달하도록 힘쓸 것이다. ∷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연구소와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친일문학상 반대 특별 전시 ‘친일문인과 그들의 작품’ 열어

    8월 15일 연구소와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는 광복 72주년을 맞이하여 친일문학상 반대 특별전시 ‘친일문인과 그들의 작품’을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앞에서 개최하였다. 친일문인들의 친일작품 전시뿐만 아니라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의 폐지를 촉구하는

    성명 발표와 친일시 낭송도 함께 진행하였다. 연구소와 자유실천위원회는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폐지 촉구 성명 중 ‘우리의 요구’에서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즉각 폐지, 미당문학상과 동인문학상의 운영 및 수상자 선정 중단, 문학인들이 친일문학상 심사와 수상을 거부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임헌영 소장은 “역사적으로 친일파 청산에 가장 앞장 선 이들이 문학인이었다. 친일파 청산에 앞장서야 하는 문학인들이 친일문학상을 옹호하거나 상을 받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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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성하지 않는 작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문학계의 현실”이라고 지적하며 “친일문학인 뿐 아니라 모든 친일인을 기리는 각종 기념상은 없어져야 한다. 하물며 작가회의 회원으로서 이 상을 옹호하는 것은 어떤 논리로도 있어선 안 된다. 광복을 맞이하여 문학인들이 친일문학상을 심사도 수상도 하지 않고, 상을 만든 기관을 비판하는 논리를 펼쳐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번에 전시한 ‘친일문인과 그들의 작품’은 요즘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서정주의 「송정오장송가」 「종천순일파」 「처음처럼」(전두환 탄신일 송가)와 이광수, 노천명 등 친일문인 14명의 친일작품들이다. 행사장 한편에서는 폭우가 내리는 와중에도 시민들을 대상으로 친일문인 문학상 폐지를 촉구하는 서명을 받았으며 많은 시민들이 서명에 동참했다. ∷ 김혜영 연구원

    ‘교육적폐 청산’을 위해 역사교과서 국정화 공익감사 청구 돌입8월 17일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사무국 연구소, 이하 국정화저지넷)’와 ‘민주사

    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서울 종로구 감사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 박근혜 정부가 국정교과서를 강행할 당시 사용한 예비비 44억과 홍보비 25억의 사용처를 밝혀달라는 감사를 청구했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가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 백서에서 ‘국민주권의 촛불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적폐의 철저하고 완전한 청산’을 약속했으나 새 정부 출범 직전까지 온갖 꼼수와 편법으로 국정역사교과서를 밀어 붙이던 교육부만은 아직까지 적폐청산을 위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국정교과서 추진과정의 절차적 정당성에 문제가 없었는지 꼼꼼하게 따져야만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공익감사는 국정화저지넷이 8월 7일부터 15일까지 1주일간 청구인단을 모집하여 786명의 감사청구인 이름으로 청구하였다. 피감기관은 교육부, 국사편찬위원회, 기획재정부이고 감사청구 요지는 ▲ 국정역사교과서 개발 및 홍보를 위한 예비비 편성이 정당했는지 ▲ 홍보비 25억 원의 편성 및 집행 내역이 정당했는지 ▲ 집필진 및 편찬심의위원들에 대한 연구비 및 검토비가 적절했는지 등이다.

    민변 이영기 변호사는 “재난 등 예측할 수 없는 긴급 상황에 써야 할 예비비를 국정교과서에 사용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며 “이번 감사는 정권이 자기 입맛에 맞게 예비비를 주무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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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투명한 예산을 집행하는 기초가 될 것”이라고 청구 취지를 밝혔다. 한편, 최근 국정교과서 추진 실무 책임자였던 교육부 김연석 과장이 인천의 한 중학교 교장

    으로 발령이 났다 철회된 것을 두고 일부 수구 언론을 비롯해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이 선량한 공무원들에 대한 정치보복이라고 운운한 데 대해 국정화저지넷은 8월 21일 〈국정교과서 부역자에 대한 인적 청산,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라는 논평을 통해 교육부 고위 공무원이 지난 2년 동안 박근혜 정권이 밀어붙인 국정교과서 정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저지른 불법적 행동이야말로 정치적 중립성을 위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국정화저지넷은 교육부와 국사편찬위원회는 시대착오적인 야당과 보수언론의 눈치를 볼 것이 아니라 국정교과서 부역자에 대한 강도 높은 인적 청산을 함으로써, 교육적폐 청산을 바라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 방은희 교육팀장 /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장

    연구소·한겨레21 공동기획 연속강좌 ‘적폐청산’, 열띤 분위기 속에 진행중연구소는 식민지역사박물관 홍보사업의 하나로 지난 8월 21일부터 10월 30일까지 우리 사

    회의 ‘적폐’와 과거청산의 과제를 생각해 보는 아홉 차례의 연속강좌를 마련했다. ‘김미화와 함께 하는 스타트업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열린 이번 강좌는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무엇보다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각 분야의 적폐에 대해 방송인 김미화 씨가 묻고 전문가들이 답하는 토크쇼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사진제공 : 한겨레21

    강좌는 매주 월요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70여 명의 참가자들이 한겨레신문 청암홀을 가득 메운 가운데 김미화 씨의 재치 있는 진행과 우리 시대 최고 전문가들의 열정 넘치는 강의, 시민들의 날카로운 질문으로 회를 거듭할수록 열띤 분위기를 더해가고 있다.

    특히 이번 강좌는 연구소와 포럼 진실과 정의, 한

    겨레21, 한겨레TV,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등 여러 단체들이 기획 단계부터 실행까지 머리를 맞대고 협력하여 진행한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크다 하겠다. 10월 30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강좌는 추후에 한겨레TV를 통해 소개될 예정이며 개별 수강(2만원)도 가능하다.(접수: 한겨레교육문화센터, 02-3279-0900, http://www.hanter21.co.kr) ∷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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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헌영 소장은 8월 12일 서울시의회 제2대회의실에서 열린 몽양역사아카데미에서 ‘항일문화예술가 열전’을 주제로 강연했다. 이날 강연에서 약 120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상임대표 윤경로)는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을 빌미로 일제에 의해 자행된 대한제국 군대 강제해산에 반대하며 치열하게 항쟁했던 대표적인 지역인 원주와 횡성을 답사했다. 회원 등 40여 명이 참석한 이번 답사는 이기원 회원(원주고 역사교사)과 심철기 박사의 안내와 강연으로 8월 12일~13일 1박 2일 일정으로 진행됐다. 첫날 일정은 군대 해산이 처음으로 이뤄진 서울 동대문훈련원공원을 시작으로 원주 민긍호 의병장 기념상·묘역, 횡성 강림 의병총을 답사했다. 답사단은 민긍호 의병장 묘역 앞에 설치된 정일권의 비석 앞에 정일권의 친일행적을 담은 안내문 설치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했다. 이튿날에는 무위당장일순기념관과 해월 최시형 피체지를 둘러봤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잡초가 무성한 피체지 현장을 보고 답사단 모두 안타까워했다.

    한편 기념사업회는 대한제국 군대 강제해산 반대 항쟁을 담은 판넬을 제작하여 7월 31일부터 8월 15일까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12옥사 내에서 전시하기도 했

    단신 다. 이번 답사와 전시회는 국가보훈처의 후원을 받았다.▪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은 8월 16일부터 21일

    까지 중국 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충칭 등으로 답사하는 ‘3·1운동 100년 독립 대장정’에 참가했다. 이 행사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상임공동대표 박남수 천도교 전 교령)가 주최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순례기행의 하나로 진행된 것이다.

    ▪ 함세웅 이사장과 이만열 지도위원은 여성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회장 김희선 전 의원)가 8월 14일부터 15일까지 진행한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추모대행진’에 공동추진위원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함세웅 이사장은 8월 17일에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반도 전쟁도발 음모 분쇄를 위한 재야인사 기자회견’에 이름을 올렸다. 8월 18일에는 서울 종로5가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박형규 목사 1주기 추모제’에서 추모사를 했다. 박형규 목사는 한국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의 주역이자 ‘행동하는 신앙인’, ‘길 위의 목사’로 초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이날 추모제에서는 10월 19일 발족 예정인 (가칭) 수주박형규목사기념사업회에 대한 취지 소개와 사업계획도 발표됐다.

    ▪ 연구소 초대 이사를 지낸 명진 스님에 대해 조계종이 8월 16일 제적 징계를 확정했다. 명진 스님은 조계종 내부 비위 등을 고발하고 세월호, 용산참사 등 다양한 사회 현안에 대한 목소리를 내오고 있었다. 징계가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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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자 명진 스님은 8월 18일부터 조계종 앞에서 ‘조계종 적폐 청산’을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고 이에 시민사회의 응원이 이어지고 있다. ▪ 연구소 집행위원회(소장, 운영위원장단, 실국장 연석

    회의)가 8월 23일 연구소 3층 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회의에서는 각 부서별 주요 사업 보고를 비롯해 식민지역사박물관 설립을 위한 법인 문제, 연구소 정관, 운영위 내규 개정 방향 등에 대해 논의했다.

    ▪ 8월 24일 대일과거청산소송연구모임(준)이 발족하여 첫 모임을 가졌다. 민족문제연구소,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과거사청산위원회의 협력사업으로 발족한 이날 모임은 민변 회의실에서 연구소의 연구진 6인(김민철, 김승은, 김영환, 김진영, 노기 카오리, 조시현), 보추협 대표 이희자, 민변의 이석태, 장완익, 이상희 변호사 및 관련 연구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대일소송의 현황 파악, 자료 정리와 연구를 위한 계획이 논의되었고 당분간 연구인원을 보강하면서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확정될 때까지 매월 준비모임을 계속하기로 하였다.

    ▪ 김삼웅 지도위원은 8월 30일 백암 박은식 평전(채륜출판사)을 펴냈다. 박은식은 한말과 일제강점기에, 국민계몽과 국권수호 그리고 민족독립에 생을 바친 분이다. 교육자이자 고대사연구가이면서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그의 생애는 ‘국혼사상’으로 귀결된다. 박근혜가 말한 ‘비정상적인 혼’에 관한 이야기가 아

    지부지회소식

    ▪ 아산지회(지회장 이재윤)는 8월 14일 아산YMCA에서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을 맞아 〈2017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및 8·15기념 어플로지 상영회〉를 아산시민단체협의회와 공동으로 주최했다. 영화 상영에 앞서 선문대 학생들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발표도 있었다. 어플로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로 납치되고 강제로 끌려간 약20만 명이 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한국의 길원옥 할머니, 중국의 차오 할머니, 필리핀의 아델라 할머니의 인생 여정을 그렸다.▪ 부천지부(지부장 박종선)는 8월 15일 부천시청 1층 로

    비에서 진행된 통일문화제에 부스 등을 설치하고 참여했다. 지부는 안중걸 작가가 시민들을 대상으로 캐리커쳐 그려주기 행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우천으로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비교 판넬 전시회를 진행하지 못해 아쉬웠다.▪ 고양파주지부(지부장 서승의)는 8월 15일 화정중앙

    공원에서 ‘광복72주년 해방거리 재현과 경축음악회'를

    니다. 박은식의 국혼은 민족의 ‘역사’ 그 자체이다. 국혼을 지키면 그 나라는 결코 멸망하지 않음을 강조하며, 역사 왜곡 세력에 맞서 공정한 위치에서 정직한 역사를 글로 남기고자 쉼없이 노력하였다. 민족사연구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삼은 것이다. 그렇게 남긴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우리 역사의 소중한 유산이 되었다.▪ 국가공무원노동조합은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적폐

    청산은 친일청산에서 시작해야한다”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국가공무원노동조합은 박정희 기념우표 저지활동 당시 연구소와 연대한 바 있다.▪ 박정희 기념우표 취소활동을 함께 벌인 우정사업본부

    노동조합(위원장 이형철) 집행부와 임원들이 8월 17일 연구소를 방문해 지속적인 적폐청산 활동에 대해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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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했다. 고양시 후원으로 진행된 이날 행사는 비가 오는 가운데서도 최성 고양시장을 비롯해 많은 시민들이 참석했으며 만세재현행사를 비롯해 다문화밴드, 백창우와 굴렁쇠아이들, 임진강예술단 등 다양한 공연이 펼쳐졌다.

    ▪ 제주지부(지부장 송승호)는 8월 15일 산지천 분수광장에서 ‘광복72주년 8·15기념행사’를 진행했다. ‘역사, 문화, 콘서트–춤, 8·15를 추다’라는 제목의 이날 행사는 제주시청, 전교조, 노무현재단, 제주문화원 등이 함께했으며 작년에 이어 플래시몹, 사진전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졌다.▪ 충남지부 권희용 지부장과 장명진 지부 고문(전농 충

    남연맹 의장 겸 충남평화비추진위원회 대표) 등은 8월

    22일 충남도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위안부 모욕 막말한 이기원 전 바른정당 충남도당 대변인과 바른정당은 피해자와 국민에게 사과하라”고 촉구했다. ▪ 8월 22일 원주시 중앙동 미네르바의 올빼미 카페에서

    연구소 원주횡성지회를 설립하기 위한 준비모임이 있었다. 이날 모임에는 이기원, 유창구, 권소희, 이진석, 김주영, 이경호, 정목영 회원, 방학진 기획실장이 참석했으며 이기원 회원(원주고 역사 교사)을 임시 총무로 결정하고 9월 15일 두번째 준비 모임을 갖기로 했다. 회원들은 민긍호 의병장 묘소 앞에 친일파 정일권이 충

    혼탑을 세운 설립과정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제기할 방침이다.

    ▪ 서울서부지부(지부장 김방원)는 8월 25일 마포 샤브향식당에서 지부 모임을 가졌다.▪ 경기북부지부(지부장 이희주)는 8월 26일 의정부 검

    은돌계곡으로 하계 야유회를 다녀왔다.▪ 인천지부(지부장 이민우)는 죽산 조봉암 선생 서거 58

    주기를 맞아 8월 27일 선생의 고향인 강화도에서 역사답사를 진행했다.▪ 전북지부(지부장 김재호)는 8월 29일 전주 전북농업

    인회관에서 ‘여순항쟁과 불량국민들’이라는 주제로 초청강연회를 열었다. 이 강연회는 주철희 박사(전 연구소 전남동부지부장)가 강사로 나섰다.▪ 경기성남광주지부(지부장 허남해)는 8월 30일 경기

    광주역에서 광주 소녀상 건립을 위한 솜씨마켓에서 독립운동가, 친일파 비교 판넬 전시회를 열었다.

    회원동정

    ▪ 홍석경 회원(과천의왕지부장)이 7월말 산딸나무와 터키여행을 펴냈다. 홍 회원은 1990년대 초부터 우리 문화유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20여 년간 ‘뿌리와 샘’ 문화유산답사회 회원으로 활동해왔고, 중국 실크로드 주변의 유적지와 터키·그리스 여행을 통해서 관심분야를 인류문명사로 확대하였다. 터키여행 중 칠보무늬가 인류 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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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 청동기 문명을 일으킨 인더스계곡 문명인이 창안한 산딸나무 문양이 로마제국으로 건너간 다음 비잔틴 제국과 중국을 거쳐 고려에 전달된 문양임을 밝혀냈다. 이 책은 실크로드를 따라서 칠보무늬의 원조 문양을 찾아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기술하고 있다.▪ 30여 년 교단생활을 마무리한 뒤 허형식 장군 항

    일유적답사기 등 근현대사에 천착하며 역사 관련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는 박도 회원이 2018년(또는 2019년) 6·25 전후하여 〈박도 선생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한국전쟁〉 (가제) 발간 자료 준비를 위한 스토리펀딩을 진행하고 있다. 박 회원은 제반 여건이 마련되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다시 찾아가 한국전쟁 사진자료를 검색하여 수집해 오고자 한다. 스토리펀딩 사이트는 https://storyfunding.daum.net/project/15818.▪ 원로 극작가인 노경

    식 회원의 작품인 연극 ‘반민특위’가 8월 11일부터 20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상연됐다. 연극 ‘반민특위’는 2005년 초연된 바 있으며, ‘작가 특유의 역사 사실적 안목과 기록극의 무대화를 완성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노경식 회원의 배려로 연구소 회원의 경우 1만원으로 입장할 수 있었고 임헌영 소장을 비롯한 많은 회원들이 연극을 관람했다.▪ 울산지부 김병학 회원은 8월 16일 울산 동구청강당에

    서 울산노동역사관 1987 주최로 열린 ‘보성학교 복원에 관한 시민공청회’에 울산지역과 동구 항일유적 현황 및 보전방안에 대해 발제했다. ▪ 진주지회 총무인 강호광 회원은 8월 19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도둑골의 붉은 유령 – 여양리 뼈무덤의 비밀’편에 출연해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해 인터뷰 했다. 강 회원은 연구소 등이 진행하고 있는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 작업에 적극 동참한 바 있다.▪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의 손자인 김진영 회원(의정

    부시청 근무)이 8월 25일 별세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 만화가인 부천지부 안중걸 회원이 8월 29일 모친상을 당하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두희 회원(경북대 의과대학 명예교수)이 얼마 전 별

    세했다. 김두희 회원은 경북대 의대 교수와 동국대 의대 학장으로 35년을 대학에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헌신했으며, 경북대 보건대학원장을 역임하며 지역민의 건강증진과 보건의료인력 양성에 크게 공헌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상근연구자 활동가 동정

    ▪ 박한용 연구실장은 8월 10일 경희대 청운관 409호에서 동대문시민회의 주관으로 “우리시대의 역사적폐”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8월 26일에는 서울충정로 벙커1에서 출판사 생각정원이 주관한 8·15특집강좌에 출연해 ‘역사적폐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강연하였다. 8월 31일 오후 4시 성프란시스대학 학생들과 함께 일제강점기 조선신궁이 있었던 남산 일대 국치현장을 탐방하였다.▪ 이준식 연구위원은 8월 11일 독립기념관 교원직무 연

    수교육에서 ‘일본군 장교에서 독립군으로 지청천 장군’이란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8월 19일 원주 박경리문학공원에서 여는 토지한국사학교 강좌에서 ‘독립운동과 친일로 보는 해방 이후 한국영화’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박수현 연구실장은 8월 11일 용인시 문화예술원 국제

    회의실에서 열린 ‘2017 용인독립운동 학술대회(대주제 : 일제강점기 용인지역 청년·농민·여성의 독립운동)에서’ 일제강점기 용인의 농민운동‘이란 주제로 발표했다.▪ 방학진 기획실장은 8월 11일 OBS와 수원과 화성 일대

    의 홍난파 기념시설물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는 인터뷰를 했다. 8월 15일에는 양산진보연합 회원들을 대상으로 중명전, 아관, 경교장 등을 안내했다. 8월 18일에는 구리느티나무의원에서 구리 노사모 주최 모임에서 대한민국 민주공화제의 역사와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 대해 강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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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저지에 온 힘을 쏟아

    인터뷰어 : 방학진 기획실장 / 정리 : 조한성 선임연구원

    지난 7월 12일 우정사업본부는 서울중앙우체국에서 열린 우표발행심의위원회 회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년 기념우표의 발행 계획을 철회했다.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은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 추진되었던 대표적인 역사적폐 중 하나로 꼽혀 왔다. 이번 기념우표 발행 철회에는 1년여 간 발행 철회를 끈질기게

    요구해온 우정사업본부 소속 공무원노동조합의 가열찬 투쟁이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도 이에 적극 동참한 바 있다.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 철회를 이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공무원노동조합 우정사업본부 이형철 위원장을 만났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공무원노동조합 우정사업본부 노조는 어떤 노조인지 소개해 주세요.

    사실 우정사업본부에 노조가 상당히 많습니다. 집배원과 우체국 창구에서 근무하는 분들로 구성된 전국우정노조가 있는데 이분들은 2만 7천여 명 되구요. 저희는 2선에서 행정 관리를 지원하는 행정기술직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입니다. 정 조합원이 5천여 명 되구요, 후원회원까지 포함하면 7천여 명이 됩니다.

    어떻게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년 기념우표 발행 철회 운동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우표 발행 문제는 작년 9월 국정감사에서 처음 불거졌습니다. 기념우표 발행에 대한 심의는 작년 5월에 있었는데, 심의 사실을 꽁꽁 숨겨놓고 있다가 국정감사에서 심의 사실이랑 발행 계획이 드러나면서 문제가 된 거죠. 신경민 의원 등이 문제 제기를 하자 우정사업본부는 절차대로 합법적으로 진행한 것이라고 변명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원래 정치적 학술적 종교적 논쟁이 있는 경우에는 우표 발행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원칙이 있는데, 우표발행심의원회의 회의록을 보니 이러한 원칙이 제대로 설명되지도 않았고, 사실상 논의

    인터뷰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공무원노동조합 우정사업본부 이형철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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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체도 제대로 한 것이 없었거든요.그래서 9월 29일 우리 노조는 우정사업본부에 공

    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한편, 노조 중앙집행위원회 회의를 거쳐서 기념우표 발행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우정사업본부는 우리의 문제제기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했어요. 본부장 등 관리자들을 여러 차례 만났는데 당시는 박근혜정부가 아직 살아있는 권력이었고 대통령의 아버지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에 말도 못 꺼내게 했습니다. “과거에 친일을 했어도 해방 후 조국 근대화에 큰 공로가 있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행

    위를 합리화하기까지 하더군요.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언론에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과 최명길 의원 등 야당 의원들을 통한 지속적인 문제제기뿐이었습니다.

    기념우표 발행 철회 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였겠군요?

    네. 올해 3월 9일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고 난 후 우리 노조는 4월 3일 다시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념우표 발행 문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재차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우정사업본부 본부장과 임원들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상급단체인 국가공무원노조에 기념우표 발행 문제를 과잉 의전 문제와 함께 우정사업본부 내 적폐사례로 보고하고 공동 투쟁을 요청했습니다. 내부 문제를 외부로 확대시키는 것이었으니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우리는 6월 12일 기념우표 발행의 재검토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우표발행을 책임지는 우편사업단장과 면담하여 발행 취소를 하지 않으면 반대투쟁에 나설 것이고 발행을 강행할 시 우표발행정지 가처분신청을 내겠다고 밝혔습니다. 우리는 6월 13일부터 7월 12일까지 광화문에서 1인 시위를 진행했고, 국가공무원노조에서는 6월 29일부터 정부세종청사 우정사업본부와 광화문에서 1인 시위를 했습니다. 6월 22일에는 광화문1번가 국민인수위 앞에서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규탄 집회도 가졌습니다. 우리는 언론사들과 여러 번 인터뷰도 했는데, CBS 권민철 기자가 자세히 다뤄주면서 여론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결국 6월 29일 좋은 소식이 들려왔어요. 당시 심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심의위원들의 문제제기로 재심의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7월 12일 재심의가 이루어졌는데 장소는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어요. 우리는 광화문우체국 앞에서 피케팅을 했는데 민족문제연구소도 함께 해주셨죠. 원래는 광화문우체국에서 하기로 했었는데 1시간 전에 서울중앙우체국으로 바꿨다고 해요. 우리가 광화문우체국에 모여 있으니 회의 장소를 바꾼 거 같아요. 결국 참석한 심의위원 12명 중에 발행철회 8명, 발행찬성 3명, 기권 1명으로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이 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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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되었습니다. 투쟁에는 승리했지만 노조 입장에서는 잃은 것도 많았습니다. 우정사업본부장이 8월 16일 퇴

    임하면서 노사간 이미 합의했던 12개 사항에 대한 사인을 해주지 않고 갔거든요. 적지 않은 희생을 통해 얻은 소중한 승리인 만큼, 아무쪼록 우리의 투쟁이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2009년 9월에 민족문제연구소에 가입해주셨는데 어떤 계기로 가입하셨나요?

    당시 친일인명사전 발간이 사회적 이슈이기도 했구요. 처음 민족문제연구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조정래의 한강에서 임종국 선생님의 이름을 발견하면서였어요. 얼마나 대단한 분이길래 소설에 실명으로 등장할까, 궁금한 마음에 임종국 선생님이 쓴 『친일문학론』도 구해 읽고, 인터넷도 뒤져봤어요. 그런데 그분이 친일연구를 하다가 자기 아버지의 친일 사실을 발견하고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묻자, 친일연구서를 쓴다면서 나를 빼면 그 책은 죽은 책이 된다고 하셨다고 해요. 이런 분을 기리는 단체라면 괜찮지 않을까 해서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역사 문제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학창시절엔 그다지 역사에 관심은 없었는데, 아이들 키우면서 박물관 같은 데를 자주 갔어요. 박물관에 가서 책도 사주고 그러다 보니 아들이 전북대 사학과에 들어가더라구요. (웃음) 원래 저희 아버지가 역사에 관심이 많으셨는데, 자연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저는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을 보면 좀 그렇더라구요.

    요즘 시대 화두가 적폐청산인데 앞으로 우정사업본부 노조의 계획은 어떤 것이 있나요?

    제가 지난번에 민족문제연구소 여름수련회에 참가하면서 아산 현충사 표준영정 문제에 대해 처음 알게 됐어요. 이런 문제도 공무원들이 제대로 협조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인데요. 문화재청 출신인 국가공무원노조 안정섭 위원장과 얘기를 나눠보니 표준영정 문제도 담당이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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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체육부와 문화재청으로 나눠져 있어서 사정이 복잡하더라구요. 그래도 해당 부처 일이니 한번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해서, 얼마 전에 안정섭 위원장이 저와 함께 민족문제연구소를 방문했습니다. 그 결과 이번 8월 15일 국가공무원노조에서 친일청산과 표준영정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논평을 발표했습니다.

    노조측에서 친일청산운동에 적극 나서 주시니 저희로선 큰 힘이 되네요.

    사실 지금까지 노동조합운동을 하면서 노조가 사회적 이슈에 적극 동참해야할 필요성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흔히 노조들이 처우개선이나 연금문제 같이 자기 문제에만 매몰될 때가 많은데요. 그럴 경우 국민들에게 도와달라고 해도 통하지가 않거든요. 저희가 작년부터 계속 얘기해온 것이 우리 노동조합도 뭔가 사회적인 이슈에 참여하고 국민들이 호응할 수 있는 일에 함께 나서야 우리들이 우리의 문제를 풀어갈 때 국민들에게 부탁도 할 수 있는 거라는 거예요. 이번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 취소 운동을 하면서도 느낀 것이 우리 노동조합의 힘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민족문제연구소와 같은 시민단체와 연대하고, 국회의원실, 언론과 힘을 합친 것이 승리의 원동력이 된 것이지요.

    국가공무원노조는 26개 부‧처‧청의 노조가 모여 있는 곳이잖아요. 연구소가 적폐청산, 친일파 청산 문제를 다룰 때 대개 첫 번째 부딪치는 곳이 공무원조직인데, 그런 점에서 앞으로 연구소도 국가공무원노조와 연대할 기회가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네, 표준영정 문제가 두 번째 연대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외교부도 우리 국가공무원노동조합 지부니까 야스쿠니 문제도 다룰 수 있을 거구요. 앞으로 우리 공무원노조도 민족문제연구소와 연대해 친일청산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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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권을 제작해보내주었다.▪ 일본 센다이에 거주하는 최영환 회원이 8월 8일 연구소를 방문해 상근자 간식비를

    전달하고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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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 친일파 14

    정경유착의 원조이자 매판자본가 1호 박흥식

    박광종 선임연구원

    횡령과 폭리로 미군정하 법정에 선 박흥식1946년 2월 15일 화신백화

    점 사장이자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대표이사인 박흥식은 신내영 검사가 지휘하는 검사국에 의해 구속되었다. 그러나 당시 경기도경찰부장으로 있던 장택상의 농간으로 담임검사의 허락도 없이 풀려났다가 이튿날 다시 잡혀왔다. 그는 검사국에 구속된 지 열흘 만인 2월 26일 장물기장죄(贓物寄臧罪)·횡령·사기·포고령 위반 등의 죄명으로 기소되어 공

    판에 회부되었다. 검사의 공소장에 의해 박흥식의 피의사실을 정리해보면 다음 세 가지다.첫째, 박흥식은 1945년 8월 27일 조선군사령관 고쓰기 요시오 중장로부터 조선비행기공업

    주식회사의 정리기금이란 명목으로 3,150만 원을 받아 식산은행의 차입금, 민규식 외 351명의 주주들에게 주식대금을 지불하고 남은 1,300만 원을 착복하였다.

    둘째,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회사가 문을 닫게 되자 강제 징용되어 끌려온 2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퇴직금과 위로금 문제로 들고 일어났다. 그래서 8월 27일 박흥식이 조선군사령관에게서 노자문제 해결기금과 위로금 명목으로 2천만 원을 받았으나 노동자들에게는 전혀 주지 않고 조선은행과 식산은행 등에 가족, 친척, 회사 임원 명의로 차명 예금하여 이를 은닉하였다.

    셋째, 1945년 11월 15일 화신백화점을 개업하면서부터 박흥식은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종업원에게 조선총독부가 배급해준 포목 등 생필품을 전부 매장으로 돌려 매입가의 최고 45배로 판매하여 1946년 2월까지 70만 원의 폭리를 취했다.

    1946년 3월 19일 횡령 및 포고령 위반 혐의에 대한 박흥식의 1차공판이 열렸다. 동아일보 1946.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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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건의 첫 공판은 3월 19일 오전 10시부터 서울재판소 대법정에서 이천상 판사의 주심 아래 개정되었다. 방청석에는 박흥식 가족과 화신 관계자, 박흥식의 심리광경을 보고자 몰려온 군중들이, 변호사석에는 강병순, 배정현, 백붕제, 김광근이 앉아 있었다. 이런 가운데 박흥식은 고동색 두루마기에 회색 바지, 검정운동화, 귀를 덮은 머리에 용수를 쓰고 손목에 고랑을 차고 간수에게 끌리어 법정에 들어섰다.

    이천상 재판장이 “피고는 어떠한 뜻으로 일본 군부가 관계하는 조선비행기회사 초대 사장에 취임하였는가”라고 묻자, “당시 총독부와 군사령부에서 강제적으로 시켜 피할 길이 없이 부득이 취임하였을 뿐이며 군부에서 받았다는 돈도 회사에서 당연히 받을 돈이며 이 돈 역시 나 개인을 위해 쓴 일은 없으며 앞으로 이것을 활용해서 과거를 청산하고 오로지 나라를 위하여 대학도 세우고 큰 병원도 설립하고 이외 여러 가지 대사업을 하려고 설계를 세우는 도중에 이런 일을 당하였다”고 유창하게 답변하였다.

    제1회 공판에서 시작하여 7차 공판까지 열렸는데 그동안 박흥식이 복역하던 서울형무소 감방에는 전기히터 등 각종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감방이 아니라 별장이나 다름없다는 비아냥을 들었다. 변호인단은 담당검사의 병환으로 공판이 연기되자 판사를 찾아가 공판 강행을 요청하거나 박흥식의 건강이 나빠졌다는 이유로 병보석을 강청하는 등 무리한 요구를 일삼아 사회적인 질타를 받기도 하였다.

    3월 26일 제6회 공판으로 심리를 전부 마치고 신내영 검사는 “박흥식은 세상이 다 아는 민족반역자이므로 마땅히 극형에 처해도 가할 것이나 그 법적 근거가 아직 없음이 유감이다. 그러나 장물기장, 폭리 등 죄상이 뚜렷하니 징역 3년에 벌금 200만 원을 구형한다”고 준엄하게 논고하였다. 검사의 징역 3년 구형에 대해 사회적으로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박흥식에게 실형 언도가 내릴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천상 판사는 5월 3일 서울지방법원 제4호법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언도하였다. 그는 “미군정하에 있는 본 법정으로서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처단할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다”고 운을 뗀 후 검사가 제시한 피의사실 세 가지에 대해 모두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49년 반민특위 재판정에서도 박흥식은 전혀 반성함이 없이 모든 친일 행위를 조선총독부와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한 것이고,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덕택으로 2천 명의 동포가 목숨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고 오히려 큰소리쳤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철저히 망가진 반민특위는 결국 적반하장의 매판자본가 1호에게 무죄판결을 내림으로써 역사정의 실현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진남포 미곡상에서 ‘조선의 백화점왕’으로박흥식은 1903년 8월 6일 평안남도 용강 지역 토호였던 부친 박제현과 모친 이선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1살 연상의 친형 박창식이 일찍 죽고 아버지도 39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어린 나이에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게 되었다. 박흥식은 1915년에 용강공립보통학교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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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고향에 머물며 한학을 배우다가 17세 때 진남포로 나와 진남포상공학교를 다녔으나 중도에 그만두었다.

    1919년 2월 박흥식은 진남포 비석리에서 미곡상을 시작했다. 19세 때인 1920년 2월에 평안남도 용강에서 선광당인쇄소를 설립했으며, 1924년 3월 자본금 10만 원의 선광인쇄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1925년 10월부터 1928년 5월까지 면화와 미곡 등 지역물산 매매와 알선을 하는 서선흥산주식회사를 경영하였다. 미곡상을 시작으로 상업활동에 투신한 박흥식은 천부적인 상술과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여 사업에 성공, 용강 지역 최대 지주로 성장하였고 이후 인쇄업과 무역업을 통해 향후 지물업을 시작할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박흥식은 1926년 서울로 올라와 그해 6월 선일지물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서울 시내의 출판사와 인쇄소를 중심으로 영업하였는데, 인쇄용지를 다량 구입하는 고객에게 금강산 관광과 일본 유명 관광지 여행을 사은품으로 제공하는 판매전략이 기대 이상의 호응을 받아 전국 각지의 수백 군데 거래처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여세를 몰아 이듬해인 1927년 지물업의 메이저 사업인 신문용지에 도전하였다. 박흥식은 신문용지를 공급받기 위해 일본에 건너가 굴지의 제지회사와 교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하지만 곧바로 수입선 다변화를 꾀해 스웨덴의 제지회사와 교섭하여 양질의 신문용지를 훨씬 싼 가격에 공급받았다. 더욱이 조선총독부 외사과장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의 알선과 박리다매 전략으로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매일신보 등과 신문용지 전속구매계약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1929∼1932년 매년 150만 원을 초과하는 판매액에 2만 원 안팎의 당기순이익을 얻었다. 25만 원의 소자본으로 출발한 선일지물주식회사는 이후 2배로 증자하고 연간 판매고가 500만 원에 이르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1930년대 초반은 1929년 세계대공황의 여파가 차차 가라앉고 서구자본주의경제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고, 일제는 상품시장 확대와 원자재 확보를 위해 만주 침략을 강행한 시기였다.

    1920년대를 거치며 조선인들의 문화수준과 소비성향이 한껏 높아졌고, 이 무렵 호경기를 반영하듯이 서울에서도 미쓰코시, 조지아, 미나카이, 히라타 등 4곳의 일본백화점이 경합을 벌이며 성황 중이었다. 박흥식은 오랜 기간 관심을 두고 있던 자본주의의 꽃인 백화점사업에 진출하였다. 1931년 신태화가 경영하던 금은 잡화의 화신상회를 인수하여 자본금 100만원의 화신상회를 설립하였고, 1932년 5월 목조 2층 규모의 화신상회를 콘크리트 3층으로 증개축해 최신식 초대형 종합잡화상으로 탈바꿈시켰다. 하지만 두 달 뒤 바로 옆에 들어선 최남이 경영하는 동아백화점과 2개월간 전쟁 같은 혈투를 치렀다. 박흥식은 혈투 직후 염가양품(廉價良品) 전략 즉, 질 좋은 상품을 싸게 판다는 방침을 천명하고 일본 오사카에 3층 빌딩을 임대하여 그곳에 오사카 구매부를 설치하고 일본 제조업체로부터 각종 상품을 공장가격으로 직수입하였다. 그 덕택에 동아백화점은 물론 일본 백화점보다 훨씬 싼 가격에 물건을 내놓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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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리할 수 있었다. 1932년 최남의 동아백화점을 인수해 종로 상권을 평정하였고, 평양에 세워진 평안백화점까지 인수하여 조선인 유일의 백화점 사장이 되었다. 1935년 연초에 화신상회가 화재로 전소하자 화신백화점 신축공사를 추진해 1937년 11월 지하 1층과 지상 6층, 연건평 2,034평, 엘리베이터 4대, 에스컬레이터 2대를 구비한 최신식 화신백화점을 개설하였다. 이로부터 광복 직후까지 화신백화점은 서울의 명물이자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1938년 6월에는 진남포에 3층짜리 화신백화점 진남포지점을 개설하였다.

    1934년 박흥식이 백화점사업과 연계해서 야심차게 준비한 것은 연쇄점 방식의 유통업 진출이었다. 당시 4대 일본백화점이 주요 지방도시에 지점을 설치해 현지 중소 상인의 타격이 컸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박흥식은 1934년 6월 연쇄점 모집 공고를 일간신문에 발표하였다. 조선 전역에 걸쳐 1천여 개소의 화신연쇄점을 개설하는 한편, 화신측이 이들 연쇄점에 자금과 상품을 공급하는 등 자금과 판매를 일원화한다는 구상이었다. 또한 지방의 소상인들로 구성된 가맹점의 자금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자금 대신 부동산을 받아 이를 담보로 식산은행에서 자금을 대출받았다. 이 자금으로 상품을 구입해 연쇄점에 공급하며 상품 결제도 현금이 아닌 장기 어음으로 하도록 하고 그 어음을 식산은행에서 할인받아 현금화하려는 것이었다. 1934년 11월 제1기 계획으로 350개의 연쇄점이 개설되었고(1937년 중일전쟁의 여파로 추가 모집을 중단함), 저가 상품 구매를 위해 일본 오사카지점을 신설하는 한편 개별 연쇄점에 대한 원활한 상품공급을 위해 주요 5개 도시에 상품배급소를 설치하였다. 연쇄점사업이 확대되자 1936년 3월 자본금 200만 원의 화신연쇄점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화신백화점에서 독립시켰다.

    1939년 시점에서 박흥식은 화신백화점을 필두로 한 6개의 화신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자본금 25만 원의 선일지물주식회사(용지도매업), 100만 원의 화신주식회사(화신백화점), 200만 원의 대동흥업주식회사(부동산), 200만 원의 화신연쇄업주식회사, 270만 원의 화신무역주식회사, 50만 원의 제주도흥업(부동산, 취체역 사장은 박준석)이 바로 그것이다. 1926년 상경하여 자본금 25만 원으로 시작한 사업을 13년이 채 되지 않아 총 850여 만 원의 재벌 기업

    1937년 11월 새로 신축된 화신백화점. 지하 1층과 지상 6층, 연건평 2,034평, 엘리베이터 4대, 에스컬레이터 2대를 구비한 최신식 시설로서 당시 미쓰코시, 조지아 등 일본백화점의 규모를 능가했다. 옆의 도면은 1937년 개장시 화신백화점의 층별 매장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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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로 성장시킨 박흥식은 ‘조선의 백화점왕’으로 불렸고 1938년 호별세 25,000원을 납부하여 서울 조선인 중 최대 납세자에 올랐다. 이와 더불어 그해 말 박흥식은 조선인 기업인 경성방직과 조선생명보험, 일본인 기업인 조선석유와 북선제지화학공업 등 8개 사의 중역도 겸직하였다.

    조선비행기공업 설립 주도1941년 일제는 진주만을 기습해 태평양전쟁으로 확전됐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 시행으

    로 시작된 전시통제체제는 더욱 강화되어 1941년 ‘생활필수물자통제령’과 ‘물자통제령’ 1942년 식량관리법 등으로 철저한 가격통제와 생활필수품 배급통제가 일상화되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1941년 9월 박흥식은 화신무역주식회사, 화신연쇄점주식회사, 선일지물주식회사를 합병해서 자본금 500만 원의 화신상사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대처해나갔다. 이 무렵 주력기업인 화신백화점은 일본산 수입의존도가 50% 정도여서 경성의 4대 일본 백화점에 비해 유리하여 미나카이, 히라다 두 백화점을 앞지르고 미쓰코시, 조지아 두 백화점과 대등한 영업실적을 보였다. 하지만 일본 수입품 비중이 80%를 차지한 화신연쇄점으로서는 총체적 위기였다. 앞서 말한 각종 경제통제령이 발동되고 물자공급이 중단되면서 1년 사이 350개의 연쇄점은 250개로 감축되었고 1943년에 거의 문을 닫게 되었다.

    박흥식은 1942년 12월 도쿄에서 열린 산업경제인 대표자대회에서 일본 천황을 ‘배알’한 후 비행기 제작에 뛰어들 결심을 하였다.1 1944년 7월 12일 박흥식의 주도로 조선비행기공업 설립을 위한 제1회 발기인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이하라 준지 참모장을 비롯해 군부 7명, 총독부 7명 등이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설립 취의서를 확정하고 이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하였고 7월 17일 조선총독에게서 설립인가를 받았다. 설립 취의서에서 회사 설립 목적과 사업개요, 설립 이유, 예산 및 자금조달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첫째 회사 설립 목적과 사업개요는 조선군의 지도감독에 따라 군용비행기 제조를 목적으로 한다. 1차 사업년도에 제조에 필요한 건설 및 부품 가공설비를 시설하고 2차 사업년도부터 일관작업을 추진해 월 60기 이상 제작하고, 3차 사업년도부터 월 120기 이상 생산한다. 둘째 회사 설립 이유는 세계정세의 가열찬 전국(戰局)을 고려해서 비행기의 대량생산이 초미의 급무이며 국가적 요청이다. 셋째 자금은 자본금의 반액 납입과 일부를 전시금융

    1 흔히 반민특위 박흥식 공판자료에 의거해 박흥식이 비행기 제작에 참여한 이유가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의 끈질긴 회유와 종용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면도 작용했겠지만 극심한 전시통제기에 이르러 유통업의 전망이 어두워지자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고자 하는 박흥식의 야망이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다음은 7월 17일 조선비행기공업의 설립인가를 받은 후 박흥식 설립위원장이 앞으로의 포부를 밝힌 글인데, 비행기 제작 참여 계기와 그 과정을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재작년 12월 나는 산업경제계 대표자의 1인으로서 황공하옵게도 천황폐하께 배알의 분부를 받자옵는 파격의 광영을 입었는데 이때 나는 산업경제인으로서의 책무의 중대함을 깨닫고 국가를 위한 직접 봉공의 길은 없을까 하고 생각한 결과, 비행기 증산을 위하여 정신(挺身)하기를 결의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결의와 계획을 총독부 및 군부에 피력하였던바 파격적인 지원 아래 직간접으로 편달을 받고 또 재계 각위의 절대한 원조에 의하여 예의 본사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매일신보 1944.8.19.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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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고 차입금으로 충당해서 시설하고 사업 확장에 따라 2회 자본금 납입을 통해 조달한다.”

    1944년 9월 임시발기인총회를 열어 총 자본금 5천만 원 중 제1회 납입자본금 2,500만 원의 출자관계를 결정, 주식총수 100만주 가운데 85만주는 발기인에게 배당하고 나머지는 조선금융단에 의뢰해 전국에서 공모하기로 하였다.

    1944년 10월 조선비행기공업이 정식 설립하여 박흥식이 사장에 취임하였고, 12월에는 일본 육군대신으로부터 군수회사로 지정받았다. 설립 직후 조선비행기공업의 출자구성을 보면, 법인주주로는 전시금융금고(지분율 17%) 조선식산은행(17%) 동양척식(16%) 화신주식회사(15만주, 15%) 등이고 발기인 주주 중 조선인으로는 박흥식(2만주, 지분율 2%) 박중양(0.1%) 장직상(0.3%) 한상룡(0.3%) 민규식(0.3%) 김연수(0.5%) 박춘금(1%) 백낙승(2%)이다. 박흥식과 화신주식회사는 총 100만주 중에 17만주와 17%의 지분율이고 금액으로는 400만 원으로 조선인 주주 중에 압도적 격차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비행기공업에서 만들고자 한 비행기는 ‘キ79丙’ 기종의 목철(木鐵)혼합기였다. ‘キ79丙’ 고등연습기는 만주비행기제조가 생산한 전투기 기종으로 1939년 노몬한 전투에 참가한 79식 전투기를 고등연습기로 개조한 것이다.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의 지도하에 이 기종을 생산하기로 결정하고 만주비행기제조와 기술협약을 맺고 비행기 생산자재를 수입하였다. 이와 별도로 박흥식은 10월 하순 기술진을 초빙하고 공작기계를 마련하기 위해 도쿄와 상하이를 찾아갔다. 도쿄에서는 중앙당국과 선진 비행기공장 임원들과 교섭한 결과 군수성 칙임기사 하타에 외 60여 명의 기술진을 확보하였다. 이어서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주둔 노보리부대와 교섭하여 비행기 부품 제작에 필요한 공작기계류 550대를 입수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조선직물과 동양방적의 안양공장 및 인근 토지 10만 평을 매수해 정비와 조립공장, 격납고와 비행장을 순차적으로 건설토록 하였다. 또한 기술자 양성을 위해 박흥식이 이사장으로 있던 광신상업학교를 조선비행기공업학교로 전환해서 항공과와 기계과 두 학급 240명

    ‘キ79’ 고등연습기의 하나. 만주비행기제조(주)가 97식 전투기를 디그레이드하여 고등 연습기로 제작한 것이다. 박흥식의 조선비행기공업(주)도 이와 동일한 기종의 비행기를 생산키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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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선발하여 기술교육에 힘썼다. 박흥식을 비롯한 조선비행기공업 임원들의 노력으로 1945년 5월 당시 1호기의 주익(主翼) 제작을 마치고 8월에 시험비행이 성공하였다. 이어서 제2·3호기의 부분품 제작도 9월말에 완료할 예정으로 안양공장의 비행기 양산체제가 완성될 즈음 일제 패망을 맞이했다.

    정경유착과 그 귀결로서의 전쟁협력박흥식의 성공 신화 이면에는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 곧 제국주의 권력과의 추악한 정경

    유착이 자리한다. 1926년 상경하여 선일지물주식회사를 차리고 신문용지의 거래처를 확보할 때 조선총독부 관료의 개입으로 가능했고, 1930년대에 들어와 화신백화점과 화신연쇄점의 설립자금과 운영자금을 국책은행이었던 조선은행과 식산은행으로부터 손쉽게 대출받았다. 사업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조선총독이나 총독부 관리와의 비밀 회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1935년 연초 대목 때 화신백화점이 화재로 전소되자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던 우가키 총독을 만나 구 종로경찰서 자리를 빌려 임시매장을 차리는 것을 허락받아 화신백화점의 영업 손실을 최소화했다는 일화는 총독부와의 유착관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한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시통제기에 들어서자 박흥식은 관변단체, 친일단체 간부로서 활동하고, 전쟁협력을 위한 각종 강연과 기고, 국방헌금 헌납 등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표적인 관변단체·친일단체 활동을 살펴보면 사상범의 전향업무를 담당한 경성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1937), 총독부 시국대책조사회 위원(1938),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전쟁협력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겸 이사(1938), 경성부 지원병후원회 이사(1939), 영국 타도를 목적으로 조직된 배영동지회 상담역(1939), 일제의 대표적인 경제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1941),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확대 개편한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1941),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겸 상무이사(1941) 국민총력조선연맹 연성부 연성위원회 위원 겸 국민총력 경기도연맹 참여(1943) 그리고 패망 직전인 1945년 2월 미영격멸, 성전필승을 내건 대화동맹 심의원으로 활동했고 그해 6월 전쟁협력과 황도주의 확산을 목적으로 박춘금이 조직한 대의당 위원을 맡았다.

    이와 함께 막대한 자금을 직접 국방헌금으로 헌납했을 뿐 아니라 국방헌금을 독려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937년 7월 노구교사건이 일어나자 종로경찰서에 5,000원을 냈고, 9월에는 애국경기호헌납기성회의 집행위원을 맡았다. 1939년 종로경찰서 신축 기성회비로 5만 원을 기부했다. 1941년 8월 임전대책협력회가 주관한 채권가두유격대에 참여하여 일반인에게 국방채권을 강매하였다. 그해 12월 화신주식회사와 화신상사의 종업원에게 국방헌금 3만 원을 갹출하여 종로경찰서에 헌납하였다. 1943년 7월 민규식 김연수와 함께 청소년들의 군사훈련을 위해 쓸 연성비 5만 원씩을 국민총력조선연맹에 헌납했다.

    또한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전시통제시책에 순응하며, 징병 징용을 독려하는 강연과 연설, 기고를 하였다. 「대동아전과 우리의 결의-광명의 천지를 향하여」(조광 19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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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나미 총독의 이임에 즈음한 「영원히 못 잊을 자부(慈父)」(매일신보 1942.5.30), 1942년 12월 일본산업경제간담회에 조선인 대표로 참석하여 천황을 만나고 그 감격을 피력한 「배알의 광명의 감읍」(매일신보 1942.12.16)과 「배알 1주년-지성으로 봉공」(매일신보 1943.12.17) 등 다수의 친일 논설과 담화를 발표하였다.

    해방 후 세 번의 구속, 그리고 사후의 역사적 심판해방이 되자 박흥식은 1946년 12월 화신백화점, 흥한피복주식회사, 화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취체역에 취임하였다. 1950년 화신산업주식회사 사장, 재판법인 흥한재단 이사장, 1953년 흥한방직주식회사 회장, 1959년 신선무역주식회사 회장을 지냈다. 1962년 경제개발계획 1차년도 때 외자 도입을 통해 흥한화학섬유주식회사를 설립했으나 전력난과 불경기로 큰 적자를 보고 2년 만에 손을 뗐다. 1980년 10월 화신과 그 계열사들이 300억 원의 연쇄부도로 파산하면서 박흥식은 재계를 떠났다. 1994년 5월 10일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해방 후 박흥식은 미군정, 이승만정권, 박정희정권 등 각 시기에 걸쳐 한 차례씩 모두 세 차례나 구속되었지만 그때마다 용케 빠져나왔다. 첫 번째는 앞서 말했듯이 1946년 2월 횡령과 폭리로 미군정하 서울지방법원에서 기소되어 징역 3년과 벌금 200만 원이 구형되었으나 무죄선고를 받았다. 두 번째는 1949년 1월 반민법 제4조 7항(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 경영한 자)·제7조(범죄자 옹호·도피 협조자) 위반 혐의로 반민특위 제1호로 체포되었으나 9월 26일 그는 ‘공민권 정지 2년’이라는 가벼운 구형에 이어 당일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

    다. 세 번째는 1961년 5·16군사쿠데타 직후 국가재건회의에 의해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그해 7월 석방되었다.

    여러 차례 구속과 무죄판결을 반복하며 정경유착과 친일의 죄를 무난히 넘겨온 그였지만 2009년은 절대 피할 수 없는 역사적인 심판의 해였다. 정부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선총독부의 내선일체 황민화정책과 전쟁수행에 적극 협력한” 죄목(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 2조 11호 13호 14호 17호 18호 각호 위반)으로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하였고, 그해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친일행적이 소상히 실렸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제강점기 최고의 성공신화로 포장되어온 화신기업의 성장은 제국주의 권력과의 유착과 굴종의 대가였고 일제 자본의 논리에 철저히 종속된 매판자본이었음이 역사자료에 의해 남김없이 드러났다. 역사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는 경구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광신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었던 박흥식 동상. 이 동상은 박흥식 사후인 1996년 광신재단 이사장으로 있던 그의 아들이 세운 것이다. 2001년 10월부터 민족문제연구소 서울관악동작지부 회원들이 광신고등학교 정문에서 박흥식 동상 철거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자 그해 연말에 자진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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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6일 서울중앙지방법원 317호 법정, 10시로 예정된 재판이 늦어지고 있었습니다. 선고 당일인데 정미홍씨는 10시가 넘어서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무죄를 확신하는 것인지 마음이 매우 느긋한가 봅니다. 반면 연구소 법무책임자인 저는 매우 초조했습니다. 박정희 혈서기사와 관련된 형사재판은 이번이 처음이기에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싸운 만큼 패소에 대한 두려움도 컸습니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정미홍씨가 법정에 들어왔고 뒤따라 수십 명의 어르신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분들은 태극기와 성조기가 교차되어있는 배지를 옷깃에 달고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법정에 자리 잡았습니다. 의자에 앉지 못한 분들은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순서가 후반부에 있는지 다른 여러 재판이 먼저 진행되었습니다. 한참 후에 시작된 재판, 정미홍씨가 선고를

    받기 위해 피고인석에 섰습니다. 재판부는 판결을 내린 경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 공소장의 내용, 재판의 쟁점사항, 원고와 피고 간 주장의 충돌에 대해 차분한 목소리로 정리했습니다. 마치 원고와 피고 그리고 방청객의 동의를 구하기 위한 설득 과정 같았습니다. 이 재판의 쟁점은 ‘민족문제연구소의 박정희 혈서기사 조작’ 여부였습니다. 만약 조작이 있었다면 정미홍 씨가 주장한 ‘들통난 민족문제연구소의 박정희 혈서기사조작’ 이란 트위터는 사실을 적시한 것으로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조작이 없었다면 정미홍 씨는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이 되기 때문에 유죄가 인정될 것이었습니다.

    ‘박정희 혈서기사 조작’ 주장 정미홍 형사재판 방청기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기고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